치매 증상이 있는 엄마는 내일이면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간다. 엄마를 가까이에서 돌봐온 첫째 딸은 남편의 전근으로 이주를 앞둔 듯하고, 엄마와 멀리 떨어져 지내던 둘째 딸은 생활에 여유가 없어 보인다. 엄마의 집에 들러 물건을 정리하는 큰딸도, 엄마와 근교 바닷가에 다녀오며 그간의 미안함을 토로하는 둘째 딸도 마음만큼은 편치 않다. 〈언팟〉은 미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한인 모녀가 겪는 이별의 순간을 담담히 그린다. 모녀의 복잡한 심경과는 대조적으로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첫째 딸 남편과 자식들이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기대감에 들떠 나누는 대화가 이 가족의 격조한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언팟〉은 서글픈 상황만 잔뜩 벌여두고 끝나지 않는다. 집을 떠나기 직전, 엄마는 혼자만의 귀한 의식을 치르듯, 생명의 가능성을 화단에 옮겨 심는다. 한국을 떠나 거친 미국 땅에서 삶을 일궈왔을 엄마는 임박해 오는 죽음 앞에서도 생의 기운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지혜)